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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회고록 울림 정근모 박사 프로필,가족 아들 부인 및 재산

센토스 2015. 11. 15. 08:04

TV회고록 울림'에서 우리나라 카이스트 대학과 관련된 일화를 털어놓는다고 합니다! 또한 계속 수석을 차지한 공부비결도 공개한다고 하네용^^ 'TV회고록 울림'에서는 초일류 대한민국을 꿈꾸는 과학기술자, 카이스트의 산파 정근모 교수와 대화를 나눈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정근모 박사 프로필!

 

2015년 11월 15일 오전 7시 5분에 방송되는 KBS 1TV 'TV회고록 울림'에서는 대한민국의 오늘을 만든 사람인 카이스트의 산파 정근모 교수 이야기가 공개된다고 하네용! 전국민을 놀라게 한 물리학 신동이 대한민국 과학기술계를 이끄는 인재가 됐습니다. 수석을 놓치지 않는 신동으로 주목받았던 어린 시절부터 한국과학기술원 설립의 뒷이야기까지 공개된다고 합니다!

 

수석과 수석을 계속 하며 대한민국을 놀라게 한 천재가 나타났다. 1959년 4월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 합격자 발표, 모든 언론은 이색적인 수석합격자에 주목했다. 수험생 중 가장 나이가 어렸던 21살 정근모가 수석을 차지한 것이다. 심지어 그가 원래 행정학이 아니라 물리학을 전공했다는 사실에 사람들은 더욱 놀라워했습니당!!

 

그가 시험에서 수석을 차지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 아니었다. 처음 국가고시로 치러진 중학교 입학시험에서 당당히 일등을 차지했던 그는 이승만 대통령을 직접 만나 격려를 받기도 했다. 그 후 중학교 시절 내내 전교 일등의 자리를 놓치지 않은 것은 물론 고등학교 입학시험에서도 최고의 성적을 기록했다. 고등학교 입학 4개월 만에 치른 대학입시 자격 검정고시에서도 수석은 그의 몫이었다. 그가 유일하게 일등을 놓친 것은 대학교 입학시험이었다. 하지만 당시 17살의 어린 나이였던 그가 서울대학교 물리학과에 차석으로 합격한 것 또한 놀라운 결과였다고 합니다!

 

전국적으로 소문난 모범생이었던 그는 여전히 수많은 학생과 학부모들에게 공부 비결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고 있다. 어떤 사람이라도 자신처럼 공부를 한다면 누구나 일등을 할 수 있을 거라고 말하는 정근모, 그의 공부 비결은 무엇일까용???

 

피할 수 없었던 한국전쟁이 일어났을 때 정근모 교수는 어린 시절 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천재로 유명했던 정근모에게 한국전쟁은 피할 수 없는 상처였다. 전쟁이 일어나자마자 서울은 인민군에게 점령당했고, 교장선생님이었던 아버지와 군대에 갈 나이가 된 형님은 숨어 지내야 했다. 편찮으신 어머니 대신 생계를 책임지게 된 그는 쌀 동냥을 하거나 꽈배기 장사에 나섰다고 합니다!

 

1.4 후퇴 때 석탄 기차 지붕에 올라 피난을 떠난 정근모의 가족. 극심한 추위에 어머니의 건강은 급격히 악화되었고 부산에 정착한 이후에도 나아지지 않았다. 어린 정근모는 "어머니가 곧 돌아가실지도 모른다"는 아버지의 말에 울면서 잠이 들기도 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그의 중학교 입학시험 날 어머니가 기운을 차린 것이다. 어머니는 아들의 연필을 직접 깎아주며 “이 연필로 시험을 치르면 우리 근모가 신문에 날거야”라고 응원했다. 건강해진 어머니의 모습에 기쁜 마음으로 시험장에 향했던 소년 정근모, 하지만 그것이 어머니와의 마지막 대화가 될 것이라곤 생각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놀라운 성적에 가려져 이제껏 알려지지 않았던 정근모의 어린 시절의 이야기가 'TV회고록 울림'에서 펼쳐진다. 정근모가 말하는 '한국과학기술의 요람' KAIST 설립에 얽힌 뒷이야기가 공개된다고 합니다!

 

미국 유학 중 '후진국에서 두뇌유출을 막는 정책 방안'이란 논문으로 이공계 전문 대학원의 청사진을 제시하고 미국 국제개발처의 600만 달러 원조를 받아 오는 데 성공한 정근모. 그가 KAIST 신축 당시 가장 신경 쓴 것은 최고의 기숙사를 만드는 것이었다. 우리나라에도 인재들이 연구에만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겠다는 이유였습니다!

 

최고의 건물을 짓겠다는 일념으로 세계적인 건축 전문가를 모셔오기도 했다. 그의 조언을 들은 밤늦게 까지 학교에 남아 건물들을 직접 돌봤다. 덕분에 개교 40년이 지나도록 금이 하나도 가지 않았다는 KAIST 건물들, 그 비밀은 과연 무엇일까요?

 

이렇게 몸을 아끼지 않고 최선을 다했지만 예상치 못한 어려움도 많았다. 정근모가 제안한 '한국과학기술대학원'이란 이름을 문교부가 반대한 것이다. "대학"이란 단어는 문교부 산하의 학교에서만 사용할 수 있다는 주장이었다. "기술은 '사농공상' 중 세 번째에 해당하는 천한 일"이라는 인식 때문에 기술이라는 단어가 이름에 들어가선 안 된다는 고위공직자도 있었다. 결국 KAIST의 초창기 이름은 '한국과학원(KAIS)'로 결정되었다고 합니당! 이런 어려움을 딛고 1971년 설립 된 KAIST, 그 탄생 뒤에 숨겨진 이야기가 'TV회고록 울림'에서 공개된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