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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후의 명곡' 쿠싱증후군을 극복한 가수 이은하가 멋진 무대로 우승을 차지했답니다. 과거에 방송된 KBS 2TV '불후의 명곡-전설을 노래하다'에서는 가요톱10 골든컵 특집이 펼쳐졌답니다.
이날 이은하는 쿠싱증후군 투병에 대한 질문에 "척추분리증은 자연 치유가 됐다"라며 후유증을 극복하면 된다고 밝혔다. 이어 이은하는 마지막 순서로 무대에 올랐다. 이은하가 선곡한 곡은 임희숙의 '내 하나의 사람은 가고'.
이은하는 열정적인 무대를 꾸몄다. 눈을 뗄 수 없는 압도적인 가창력이었다. 쿠싱증후군을 극복한 이은하의 멋진 무대에 대결 상대였던 정수라는 눈물을 흘리기도.
이은하의 무대 후 정재형은 "세월의 감정이 나이테처럼 고스란히 있다. 감정의 울림이 큰 노래였다"라고 밝혔다. 김범룡은 "우리나라에서 보기 드문 가수다"라며 이은하다운 무대였다고 극찬했다. 이치현은 "데뷔 때부터 함께했는데, 투병 소식에 마음이 아팠다. 오늘 보니 목소리는 여전하더라"라고 했고, 박남정은 "굉장히 깊은 예술품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라고 찬사를 보냈다.
MC 신동엽이 이은하에게 "(투병 생활로) 무대가 많이 그리웠을 것 같다"라고 하자 이은하는 "정말 그리웠다. 이 자리가 너무 소중하다"라며 무대를 향한 애정을 드러냈다. 최종 결과 이은하가 우승을 차지했다.
** 이은하의 결혼 남편은??
이은하는 최근 종합편성채널 JTBC 브런치쇼 '박경림의 오! 해피데이'에 출연, 화려한 입담을 자랑했다. 특히 그는 이날 결혼을 생각한 사람이 있었지만 결국은 실패했다고 털어놔 주위의 시선을 모았답니다!!!!
이은하는 24살, 첫사랑에 실패한 뒤 한 남자를 만나게 됐다. 하지만 그 남자는 결혼을 생각하지 않았고 아기도 낳지 않으려 했다고. 3년 간 그를 설득했으나 결국은 실패했다고 담담히 털어놨다. 이어 "지금은 남자와의 사랑에 대해서 마음을 비웠다"라며 "팬들의 사랑을 얻는 대신 남자와의 사랑은 얻지 못했다고 생각한다"라고 말해 보는 이들을 안타깝게 했다.
또 "화려한 싱글이라는 말이 좋다"라고 밝히기도 했다. 이에 MC 박경림이 "싱글이 불편할 때는 언제냐"라고 묻자 "모임에 부부동반으로 참석할 때 남자분과 이야기를 하면 아내 분들이 따가운 눈초리를 보낸다. 하지만 관광지에서는 아내 분들이 사진을 찍자고 한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더불어 "나는 나를 좋아해주는 것보다 내가 좋아해야 남자에게 매력을 느낀다"라며 남성상을 전하기도 했다.
** 이은하 프로필 경력 이력 누구??
이은하는 1961년에 서울에서 태어났으며 어릴적 이름은 이효순이었다. 아버지 이배영은 유명한 아코디언 연주자였고 이은하는 약 5세부터 음악을 접했으며 어린 나이에 무대에 출연하면서 음악적 능력을 길렀고 아버지로부터 직접 가르침을 받기도 했답니다.
처음에는 트로트를 배우기 시작하였지만 변성기를 일찍 겪어 허스키한 목소리였던 이은하는 소울 팝으로 전향하였고 초등학교 6학년에 다닐 무렵, 만 12세 나이에 1973년에 님마중(김준규 작사/작곡)으로 가수로 데뷔하였답니다.
데뷔 직후 무명 가수였던 이은하는 밤무대나 나이트 클럽에 나가서 노래를 불러야만 했고 1975년에 방송상 엄정한 규제때문에 당시 미성년자는 무대에 출연할 수가 없었다. 이러한 이유로 1958년생으로 3살 올려 등록하였으며 나이를 속일려고 일부러 화장을 짙게 하면서 20대 아가씨로 위장하여 가수 활동을 하게 되었답니다.
어렵사리 공중파 무대에 출연하게 된 이은하는 첫 히트곡이 된 1976년에 발표된 〈아직도 그대는 내 사랑〉(태정 사/원희명 곡)이 처음으로 유행세를 타고 난 이후 1978년에 유승엽이 작곡하고 작사한 〈밤차〉(유승엽 작사/작곡)를 부를 때 찌르기 춤을 선보여 선풍적인 인기몰이를 하게 되었는데 이 때부터 디스코 여왕으로 불렸답니다.
그리고 1979년에 발표하고 본인이 처음으로 작사한 〈아리송해〉(이은하 작사/이승대 작곡)가 대박을 떠뜨렸고 그 해에 KBS 가수왕상을 수상하였다. 그런데 처음에는 이 곡으로 송해라는 이름이 들어가 송해에게 혼났다는 얘기도 있다. 파워풀한 가창력을 인정받았던 이은하는 1981년에 KBS 세계 가요제의 그랑프리에 자신의 곡〈밤차〉로 출전하여 우수가창상을 수상하였답니다.
1982년에 상당한 인기를 누리고 있던 탑스타 이은하는 영화계에 발을 디뎠으며 처음으로 영화 《날마다 허물을 벗는 꽃뱀》이라는 성인영화에 주연으로 출연하여 화제가 되기도 했다. 성인영화에 출연하는데 꺼려했던 아버지 이배영은 당시 국민배우 이대근의 설득으로 이은하의 영화 출연을 허락했었답니다.
1970년대부터 허스키한 목소리와 파워풀한 가창력으로 당대 최고의 댄스 팝 가수로 각광받았던 이은하는 라이벌로 불리던 혜은이와 함께 경쟁하면서 가요계를 주름잡았답니다.
1986년, 이은하가 본인의 첫사랑과의 가슴 아픈 시련의 이야기를 가사로 담아내어 작사하고 고인이 된 장덕이 작곡하고 이은하의 백밴드 이자 노래의 주인공인 남자가 베이시스트로 있던 <호랑이>라는 밴드가 반주하고 장덕이 코러스를 넣어준 〈미소를 띄우며 나를 보낸 그 모습처럼〉(이은하 작사/장덕 작곡)이라는 서정적인 사랑의 노래를 불러 최고의 정점을 찍었답니다.
1989년, 전영록이 작사/작곡한〈 돌이키지마〉(전영록 작사/작곡) 가 마지막으로 대중들에게 많이 알려진 곡들은 거의 없었다. 그래도 이은하는 대한민국 최고의 가수로 인정받는 10대 가수상을 9년 연속으로 수상한 이례적인 기록을 가지고 있답니다.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 공백기를 가지게 되었다. 그 동안에는 콘서트나 뮤지컬을 하기도 했다. 이은하는 지난 2007년에 가수로 복귀하였고 그 해 서울가정법원에 호적정정허가신청서를 냈으며 자신의 실제 생년을 주민등록상으로 1958년에서 1961년으로 정정되었다. 2012년에는 5년 만에 새롭게 재즈분야의 음악으로 전향하여 활동하기 시작하였답니다.